한마디 :
“ 상실 끝에 찾아올 것이 무엇이든, 나를 흔들어놓지 못할 겁니다. ”
컬러인장
인장
외관 :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무심한 것처럼 보이는 인상이다. 뭇 장정들과는 사뭇 다른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대화할 때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버릇과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독특하면서 호감 어린 인상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모순적인 것은, 그는 미소짓고 있을 때보다 무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보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화를 나누는 일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2년 남짓의 군 생활은 그를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사람으로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적당히 혈색 어린 피부는 군에 몸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색소가 옅은 것은 아니지만, 햇빛에 잘 타지 않는 체질이기 때문에 군인치고 꽤 하얀 편이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은 짙고 선이 그리 굵은 편은 아니었다. 이마가 넓지는 않으나 좁은 정도는 아니고, 굵지 않으나 짙고 긴 눈썹은 좁은 편인 미간에 맞추어 그 사이의 간격이 넓지 않고 고른 모양을 띠고 있다. 옅게 쌍꺼풀진 눈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눈동자와 길고 날카로운 눈매로 이루어져, 차분하게 웃음 지을 때면 유려한 선을 그렸다. 옅은 선홍색의 얇은 입술도 그렇다.
머리카락은 눈동자와 같이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이다. 특별히 관리하지 않으나 타고난 머릿결이 좋아 매끄러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곱슬머리의 특성상 부스스해 보일 수 있으나, 머릿결의 덕분인지 머리카락은 정갈히 다듬어져 있어 단정해 보였다. 앞머리와 옆머리는 6대 4 가르마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모습이며, 뒷머리의 길이는 목을 완전히 덮는 정도이다. 뒷머리는 얇은 리본으로 단정히 묶은 상태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검을 익혀왔기 때문에 그의 몸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몸의 선은 굵지만 우락부락하지 않아 보기 좋은 정도이다. 등과 고개를 항상 곧게 유지하기 때문에 실제 그의 신장보다 크게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마디가 도드라진 긴 손가락은 작고 큰 생채기들과 흉터가 있어 늘 장갑에 가려져 있다. 그렇기에 그의 손의 거친 감촉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름
메테르니히 그레트헨 바실리예
(Metternich Gretchen Vasilije)
성별
남성
나이
35세(1741년 기준 만 34세)
키 / 몸무게
188cm / 80kg
종족
인간
성격 :
그는 철학가와 사학자 등의 지식인과 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는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어떤 사람이든 누군가를 업신여길 권리는 없고, 그 '권리'에 대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 사람이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에 대해 자각을 해야 알고,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시대를 앞서간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웬만한 일에 대해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허위에 불과한 소문이나 우스갯소리는 가볍게 흘러 넘길 수 있으나, 부모와 가문, 소중한 이에 대한 모욕에 관해서는 절대 참지 않는다. 화가 나면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는 타입이어서 그를 화나게 만드는 이들은 항상 훌륭하게도 배배 꼬인 독설을 들을 수 있었다.
공과 사의 구별이 철저하므로 때로는 냉정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워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주의하기 때문이다. 사적인 것으로 일을 그르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곧, 효율적이지 못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강박적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본인이 정한 목표를 달성해야만 하는 성향은 아니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유로운 것과 시간 낭비의 경계가 매우 뚜렷해 쉴 때는 확실히 쉬고, 일할 때는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그의 지인들은 그를 보고 무섭다고 할 때도 있다.
통상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매우 좋아한다. 흥미를 돋우는 것이라면 물건이든 사람이든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집착의 경계선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감정은 어쩌면 탐미적인 것에 대한 수집욕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른 관점의 생각을 듣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말수가 많은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적은 것 또한 아니다. 꾸밈없이,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것을 즐거워하나 겉치레를 신경 쓰느라 바쁜 다수의 귀족 사이에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유의 생각을 풀어내는 꾸밈 없이 직설적인 말투는 제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함이었으나, 점차 유려하게 필터링을 여러 번 거쳐 말하도록 바뀌었다.
사실만을 말한다면, 예의를 철저히 지키는 성격은 아니다. 상대에 따라 고압적으로 나올 때도, 겸손하거나 장난스러운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그는 인내하는 것에 익숙한 나머지 한 번 한계점을 넘기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 지쳐 그저 모든 자극에서 멀어져 자신을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계관
소망의 땅과 원망의 땅 그리고 인간의 땅으로 나뉜 세계.
인간의 땅에 사는 인간들은 아직까지 소망과 원망의 실존을 전혀 모르기에 현대와 역사의 흐름이 같다.
메테르니히가 사는 시대의 상황은 이하와 같다.
때는 18세기, 1741년의 러시아 제국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11월 25일에 발발한 쿠데타로 인하여 어린 황제와 그의 어머니, 측근들이 체포되었고, 주동자인 엘리자베타는 다음 날 아침 8시에 러시아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가 끊어짐과 동시에 몇 년 단위로 황위가 교체되기를 반복하자 백성들은 이정표를 잃은 채 건국 초부터 이어진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나라의 색깔을 견고히 한다는 명목하에 흐른 피들은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하고자 하는 황금의 무리에 가려졌다. 엘리자베타는 아버지인 표트르대제와 달리 정치보다 무도회나 연극 등 화려한 궁정 생활과 교회 활동, 서유럽의 멋진 옷 등을 사들이는 데 열중했고, 대부분의 나랏일을 고문과 총신에게 떠맡겨 궁정 내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효율적인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하였으며 농민들의 희생을 대가로 폭넓은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늘어만 갔다. 말하자면 혼란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
◈출생 : 합스부르크 군주국
◈국적 :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귀족이었으나 그가 15살이 되던 해, 일가족 모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군 복무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가 25세가 되는 늦가을(1731년 10월)이었다.
◈직업 : 황실 제1 근위대 소속 소위, 근위병.
(러시아제국 황실 육군 제1 근위(=친위)보병연대 소위)
◈취미 : 토론, 독서, 음악 감상
◈특기 : 독설
◈좋아하는 것 : 가족, 조국(합스부르크), 문학도, 친구, 봄날의 장미, 음악, 책.
◈싫어하는 것 : 거짓말, 러시아의 모든 것.
◈종교 : 로마 가톨릭, 러시아 정교
◈가족 구성원 : 어머니, 아버지, 메테르니히(장남/35세), 남동생(차남/21세), 여동생(장녀/31세), 양녀(실종)
◈가치관(좌우명)
"세상에 인격자는 존재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은 인격자일 수 없다. 반면, 인격자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캐릭터 테마곡 :
군인으로서 차르에게 충성하는 그리샤(https://youtu.be/k1U3gbyddS8)
문학도를 꿈꾸던 청년, 합스부르크의 메테르니히(https://youtu.be/hlC1-V3BSg0)
조국과 친구를 그리워하는 러시아의 메테르니히(https://youtu.be/YuHdkSj5nGc)
◈메테르니히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
◈메테르니히의 애칭은 그리샤이다.
◈메테르니히는 범성애자이다. 그러나 어렴풋이 그렇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뿐, 스스로 확실하게 자각하진 못한 상태이다.
◈메테르니히는 감정적 끌림을 느끼기 위해선 강한 감정적 관계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아 좋은 인연은 만나지 못했다.
◈메테르니히의 문체는 감성적이고 섬세하다. 한 편으로는 몹시 직관적이기도 한데, 이는 오랫동안 버릇처럼 행언을 검열하며 살았던 것이 반동처럼 작용하여 글로 드러난 것이다. 그의 글에서는 때때로 찻물의 향긋함과 따스한 햇볕과 같은 것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때때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건조하고 냉소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포지션
M
선호/기피 플레이
오너 :
선호 - 기피를 제외한 플레이
기피 - 골든, 스캇, 자지 보지 드립, 요도플.
캐릭터 :
선호 - 기피를 제외한 플레이
기피 - 딜도, 에그와 같은 기구플레이, 야외플레이, 골든, 스캇, 자지 보지 드립, DBSM.
선관
라이사 루페르키나 자하로프.
(Раиса Lupércina Zakharov)
절망의 끝에 희망을 찾은 청년에게 소망이 왔다. 소망은 청년의 가족이 되어주었고, 무언가를 갈구하기에 지친 청년에게 하나 뿐인 소망이 되었다. 청년은 소망을 딸이라 불렀고, 소망은 청년을 아버지라 불렀다. 그들은 행복하였고, 행복했었다.
선관동시합격
X
캐입편지
누군지 모를 당신께.
오늘은 조금 내용이 정돈되지 않을 수 있으니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수도에 여명이 내려앉은 날이었습니다. 요란한 나팔소리에 버금갈만한 일이 이어졌지요. 바닥에 내려앉은 여명은 마치 황제의 붉은 망토처럼 보였습니다. 어린 시동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발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값비싼 에스파냐산 비누를 자랑하던 귀부인의 낯이 창백히 질렸고, 콧잔등을 간지럽히던 분 내음과 향수 내음은 철의 비릿함으로 바뀌어 폐부를 가득 채웠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했지만, 참혹한 순간 가운데서 멍하니 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한 몸처럼 함께하던 검을 잡고 몸에 배어있는 그대로 내리그었지요. 지금 되돌이켜 보면, 내가 그은 선으로 하여금 적이 더 다가오지 못하길 바랐던 모양입니다. 어지간히 놀랐던지, 대처가 미숙했습니다. 황가가 머무르는 궁전 내에서 무장을 갖추고 있을 수 있는 것은 근위대뿐이어서 방심했던 것이지요.
황위를 계승하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라 합니다. 때로는 피가 흐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도 있지요. 알고 있으나 인지하지는 못한 것을 눈 앞에 목도하게 되었을 때의 사람은 그렇게 얼빠질 수가 없더군요. 마치 내 모습이 그랬습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으나, 겉으로 보이는 상처보다 아픈 곳이 남았습니다. 군화 바닥에 눌어붙어있던 눈이 녹아 어지럽혀진 빈 방을 잊을 수 없어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받을 당신은 부디 안전하고 안온한 곳에 있기를 바랍니다.
1741년 11월 25일, 여명이 무색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 그리샤로부터.
추신. 두드려서 모든 게 열린다면 세상에서 비극과 낭만은 사라지겠지요. 예, 갑작스럽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어서,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하고 그것들을 충족하더라도 실패하는 일이 생기고는 하지요. 나는 오늘 있었던 사건-일이라는 글자에 여러 번 빗금이 그어져 있다.-도 그런 이유로 벌어진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추신2. 위에서 언급했듯이, 황위 계승에 숙청이 뒤따르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입니다. 그 참극을 보고서도 살아남아 당신께 편지를 부치니, 신의 은총이라 해야 할까요. 처음도 아닌데 익숙해지지 않는 것에 좌절해야 할까요. 착잡할 뿐입니다. 부디 우울하고 무거운 내용의 편지를 전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생각하며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후관
알렉스 N. 발레리안.
반 년 정도 편지를 통해 알고 지낸 사이.
편지지로 쓰인 종이의 감촉을 신기해 하는 것을 보아 편지가 익숙한 편은 아닌 것 같다.
매번 편지지의 디자인이 다른 것을 통해 '편지의 대상은 다른 시대를 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 사람.
자신에 대한 언급이 적어도 개의치 않고 일상에 대한 것, 소소한 고민들을 말하며 배려해주는 편지 너머의 A.
백 화
원고지를 본 적이 없어 편지의 내용은 나중에서나 눈에 들어올 정도로 신기해한 것이 첫 편지 너머 누군가의 인상.
정중한 어조나 정갈한 글씨체를 통해 느껴지는 분위기를 통해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다.
보통은 선생님이라 하면 겸연쩍어 하기도 하는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아 호칭이 낯설지는 않은 듯.
말하기보다, 이야기를 듣기를 선택하던 일상이 뒤바껴 상대가 듣고 자신이 말하게 된 신기한 관계.
네로
서로를 아가, 그리샤.라며 친애하는 감정이 묻어나는 호칭으로 부르는 7년차 펜팔친구.
네로에게 그는 선생님같은 친구이고, 그에게 네로는 잊지 못하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아픈 손가락과 같다.
편지에 모든 것을 적지 않는만큼, 메테르니히에게 걱정과 안도가 뒤 따르게 한다.
지금까지 편지를 주고 받은 어느 누구보다도 마음의 깊이가 다른, 말 그대로 친애하는 친구.
비설
*메테르니히와 관련된 사건
1706년 5월 12일(율리우스력 5월 25일) 메테르니히 탄생
1721년 5월 7일 메테르니히와 가족 합스부르크를 떠나 러시아로 향함.
1721년 10월 20일 메테르니히와 가족 러시아 차르국 망명.
1721년 11월 21일 러시아제국 건국.
1721년 12월 3일 메테르니히 첫 일자리 구함.
1723년 표트르대제 메테르니히 가족에게 바실리예의 성을 내림.
1725년 2월 8일 표트르대제 사망.
1725년 2월 8일 예카테리나 1세 즉위
1725년 5월 17일 표트르2세 즉위
1729년 5월 1일 메테르니히, 사관학교 입학.
1730년 1월 30일 표트르2세 사망.
1730년 3월 10일 메테르니히, 사관학교 졸업. 제 1근위대 소속 근위병으로 복무 시작.
1730년 4월 안나 이바노브나 즉위.
1731년 10월 메테르니히(25세), 소위로 임관받음.(기록상으로는 31년 10월부터이나, 실제 복무는 30년부터였다.)
1734년 3월 메테르니히, 라이사 발견. 저택으로 데려와 상처를 치료해줌.
1734년 5월 메테르니히, 라이사의 신학원 입학을 돕고 후원하기 시작함.
1734년 메테르니히 일부 정교회의 광신도에 의해 치명상을 입음.
1735년 안나 이바노브나, 신성모독을 할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함.
1735년 7월 1일 메테르니히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였음을 공공연하게 말하기 시작.
1735년 8월 17일 메테르니히, 라이사 입양.
1736년 오스트리아-오스만 투르크 전쟁 발발
1736년 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군으로 오스만투르크 전쟁에 참전.
1739년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군 오스만투르크 전쟁에서 승리.
1740년 10월 28일 안나 이바노브나 사망.
1740년 10월 28일 이반6세 즉위
1741년 12월 6일 이반6세 사망
1741년 스웨덴-러시아 전쟁 선포
1741년 9월 러시아,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
1741년 10월(정확한 날짜는 아니다.) 러시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오스트리아 연합군으로 참전.
1741년 11월 25일 쿠데타 발발, 메테르니히 부상.<-러닝 첫 날 시점.
1741년 11월 26일 새벽, 메테르니히 군병원으로 이송됨. 면회금지. 라이사 실종.
1741년 11월 26일 아침8시 엘리자베타 황위에 오름.
1741년 11월 27일 라이사의 실종을 가족들이 알아차림.
1741년 12월 6일 엘리자베타 재위.
1742년 3월 6일 엘리자베타 정식 대관식을 치름.
1755년 1월 25일 러시아 제국 대학(=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설립
1762년 1월 5일 엘리자베타 사망.
로마노프왕조의 막이 내리고 홀슈타인 고토르프 로마노프 왕조의 막이 오름.
1762년 1월 5일 표트르3세 즉위.
1762년 7월 9일 표트르3세 폐위.
1762년 7월 9일 예카트리나 대제(2세) 즉위.
1773년 푸가초프의 난(=대농민반란) 발발
1774년 9월 14일 푸가초프 체포됨.
1775년 1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푸가초프 공개처형됨.
1796년 11월 17일 예카트리나 대제 사망.
1796년 11월 17일 파벨 1세 즉위.
◈메테르니히는 러시아 출생이 아닌 합스부르크 군주국에서 태어나 망명한 귀족으로써 차르(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해야만 할 반강제적인 의무가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아버지인 표트르대제는 흑인인 간니발의 대부가 되어 그를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러시아 귀족으로 받아들일 만큼 열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으나, 대부분의 귀족은 러시아에 망명하는 일부 외국 귀족들에 대하여 경계하는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합스부르크에 있는 의사들의 실력으로 완치할 수 없는 병에 걸려 하루하루 앓기만 했고, 우연히 소식이 닿은 아버지의 옛 고향 친구에게 듣게 된 러시아에 아는 의사가 있으니 진료를 받아보라는 말을 지푸라기 붙잡듯 먼 길을 떠났다.
◈조국에게서 등을 돌리고 러시아에 망명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했지만, 그런데도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그의 가족은 합스부르크의 문화와 정서, 사상과 종교를 저버리지 못해 불온요소와 같은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편찮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장남으로서 가족을 대표하여 증명해야만 했다. 그가 군에 지원할 당시 적었던 것 중, 가장 거짓되면서 진실한 것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이 나라에 아무런 위협을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익혀왔던 모든 사상과 문화에 대하여 전파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차르에 대하여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메테르니히는 합스부르크를 떠나면서 그에게 있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문학가가 되고자 했던 꿈과 같은 꿈을 꾸었던 소중한 친구에게 짤막한 편지만을 남겨두고 가진 재산을 모두 챙겨 러시아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아버지와 함께 가족 한 명만을 러시아로 보내기엔 아버지의 병세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온 가족이 함께 망명해야 한다는 선택을 내릴 땐 앞이 막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순간의 힘듦을 가족들에게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늘 합스부르크의 아침 물안개와 봄날의 장미, 시를 낭독하는 목소리가 물결 같은 친구를 그리워한다. 그것은 그가 러시아로 향한 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진 미련이다.
◈메테르니히는 몽유병이 있다. 오스트리아를 떠나와 러시아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생긴 것.
◈메테르니히는 15살에 합스부르크를 떠나오는 그 날까지 문학도를 꿈꾸는 청년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제든 그것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언제든 포기할 준비(각오)가 되어있다.
◈그렇기에 메테르니히는 자신의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히 대할 줄 안다.
◈메테르니히는 제정러시아 건국 직전, 러시아 차르국 말기(1721년)에 러시아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국내 사정은 혼란스럽고 근간을 바로 잡아야 할 일이 많았다. 1721년 11월 21일 러시아제국이 표트르대제에 의해 건국되었을 때 당시 메테르니히는 15살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급격한 서구화와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귀족과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하여 성원이 많았고, 정작 영향이 미쳐야 할 곳에는 닿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다. -메테르니히는 적극적으로 농노제 폐지를 지지했으나, 폐지되지 않은 것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메테르니히는 망명 초기(1721년~1727년)는 군 복무를 하지 않고, 귀족들의 잡다한 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하며 뼈저리게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1730년 표트르 2세 사망 후 안나 이바노브나가 황위를 이을 즈음에 힘든 일을 자처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생활이 나아졌다.
◈표트르 2세의 서거 후 추밀원의 의원들은 자신들이 그의 권력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안나를 러시아의 제위에 옹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지 얼마 후 안나는 귀족 근위병의 의뢰에 따라 그 계약조건을 파기하고 추밀원을 해산시켰다. 안나는 1730년 4월에 모스크바에서 즉위하여 원로원을 복구시켰으며 외국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고 나라를 통치했다.
◈이때 '근위병'이 바로 메테르니히이다.
◈안나는 추후 비밀경찰의 활동을 승인해 정권을 획득하며 이를 도운 귀족의 특례를 넓혀주었는데, 이를 통하여 메테르니히는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
◈1730년에 재위한 안나 이바노브나는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고자 이단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특히 그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의 16개 도시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다. 로마 가톨릭을 믿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메테르니히는 1734년에 일부 정교회의 광신도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게 된다.
◈1735년에 들어서 신성모독을 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지시할 정도가 되자 자신에 대하여 알려진 것들이 많은 위협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재차 실감한 그는 대외적으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였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가진 많은 것들을 상실하고도 또다시 상실해야 하는 상황에 비참함을 느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신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메테르니히의 애칭은 그리샤이다.
◈메테르니히의 부모님은 그의 애칭을 부르지 않는다. 그리샤는 러시아식 애칭이기 때문이다.
◈메테르니히에게 그리샤라는 애칭이 주어지기 전, 합스부르크에 있을 적 그에겐 또 다른 애칭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애칭을 불러주는 이는 이제는 아무도 없다. 부모님도, 그도 시간의 흐름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메테르니히는 러시아를 결코 조국이라 하지 않는다. 그가 조국이라 할 경우, 오로지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를 말하는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러시아를 아국이라고 말한다. 아국(我國). 내 나라라는 의미. 일부러 도드라지게 나타내는 충성심의 발로이다.
◈메테르니히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모두 그가 수행할 수 있는 한도 내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가 러시아에 있는 한 그는 늘 정신적으로 무리를 하고 있다.
◈메테르니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또 다른 인생을 개척한 것일 뿐이다. 그는 가족을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신념이라 말한다.
◈메테르니히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TMI 섞인 비설 샷 추가>
◈실제 역사에선 친위대 장교는 친위+계급명으로 불렸다.
◈친위대 장교는 동일 계급의 정규군 장교보다 관등제 상 2관등 위의 취급을 받았고, 후대에는 1관등 위 취급으로 변경되었다. 이 관등 변경이 있기 전후를 기준으로 구친위대와 신친위대를 구분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육군은 중대까지는 조직이 되어있지만 연대 이상으로 넘어가면 지휘관 재량에 따라 편제가 바뀐다. 그리고 동맹의 요청에 따라 파견하는 경우는 고위 왕족이 명예 지휘관을 맡아주기를 희망했다. 그것이 격에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테르니히는 안나 이바노브나 황위계승 시 정권 확립에 도움을 준 공으로 계급이 소위로 바뀌었으나, 주변의 알력으로 실질적인 인사이동은 없었다.
◈사실 근위대와 친위대는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데 오너가 수정찬스를 다 쓰는 바람에 신청서엔 단순히 근위병으로 쓰였다....
◈메테르니히의 소속을 정확히 말하자면 러시아제국 황실 육군 제1 근위(=친위)보병연대 소위이겠으나.......(위와 같은 이유로 이하생략)
◈오너가 군알못이라 계급에 대한 지대한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열심히 조사했지만 모르겠는 부분만 오조오억개......설정오류를 발견할 때마다 피토할 기세로 수정했지만 모르겠는게 너무 많았다..........
◈오너가 열심히 찾기는 찾았으나 어느 순간 머릿속이 뒤섞여 펜촉을 끼운 깃펜을 사용하는 것으로 말해버렸다.....
◈우리가 생각하는 깃펜의 금속펜촉은 19세기에나 만들어졌다. 고로 오너는 고증오류를 범해버린 것......
◈메테르니히의 초기설정 성격은 에릭과 비슷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곧 오너의 러닝 한계를 깨닫고 리뉴얼에 들어갔다. 결과 나온 것이 지금의 메테르니히이다.
◈메테르니히의 초기설정에서 그가 좋아하는 디저트는 자허토르테였다.
◈실제 역사에서 자허토르테는 프란츠 자허가 귀족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후작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메테르니히와 그의 가족은 합스부르크에서 배신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알 일은 없을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실존인물의 이름을 가져와서 사용한 캐릭터이다. 오너가 역사덕후여서 세계사 속 인물을 참고하고 싶었다. 원래 역사 속 메테르니히와 같은 18세기 인물이지만 태어난 시기와 생애가 다른 것이 차이점이라 말할 수 있겠다.
◈외교관 메테르니히와 러시아의 메테르니히는 일평생 만나는 일 없이 각자의 인생을 살았다. 서로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메테르니히의 미들네임인 '그레트헨'은 파우스트 속의 순수한 처녀의 이름이고, 패밀리네임인 '바실리예'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에서 참고했다.
◈본래 성씨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망명 후 황제로부터 바실리예라는 성을 받게 되었고 일가족 모두 본래 쓰던 성을 버리게 되었다. 그들이 일생의 절반 이상을 써왔고 불려왔던 성은 오스트리아의 군주로부터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직접 성을 내린 것은 분에 넘치는 영광이어야 했다. 러시아 귀족 사회에 느닷없이 발을 딛인 그들로썬 살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살기 위한 타협이 아닌, 살기 위해 항복한 것에 가까웠다.
◈러시아 이름은 '이름-부칭-성'의 순서로 이루어져있지만,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인이기 때문에 그 순서를 반드시 따라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러시아 귀족이지만, 귀족사회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주고 싶어 이름 형식도 성만 바꾸고 다른 것은 독어의 느낌을 남겨두었다.
◈메테르니히의 텍스트 트윗 내용은 파우스트에서 인용한 것이다.
◈메테르니히의 바이오 중 독일어 문장은 파우스트에서 인용한 다른 문장이다. 뜻은 '인간은 노력하는한 방황하는 법이다.'
◈이 에버노트 링크가 올라갈 트윗에 적힐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서 나오는 문장이다.
◈파우스트의 작가는 괴테이고,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메테르니히의 원래 성씨는 '바이마르'와 독일의 '뢰머광장'이라는 두 단어를 합쳐 만든 것이다.
◈메테르니히의 원래 성은 '바이뢰머'(Weiroemer) 였다.
◈본래 오스트리아 식으로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말한다면 메테르니히 그레트헨 폰 바이뢰머 일 것이다. 바이뢰머라는 영지를 가진 메테르니히라는 뜻. 러시아식으로 말한다면 미체르니 바실리예비치 그리체노프.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식 이름을 쓴다면 부칭을 표트르대제가 내려준 성으로 대체하여 사용한다. 그리체노프는 그레트헨을 러시아식으로 변형한 것.
◈바이뢰머라는 지방은 실존하지 않는다. 가상의 지명.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지명이다.
◈미체르니는 메테르니히의 러시아식 발음을 변형한 것이다. 정확한 발음은 미체르니슈(슈와 쉬의 중간 발음.).
◈메테르니히의 집사의 이름은 비코(Vico)이다. 헬베티아의 바젤슈타트 출생. 아버지가 티치노, 어머니가 바젤슈타트 출신이라 오스트리아에서 메테르니히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나 러시아에 있을 때나 낯선 어감의 이름. 유명한 신과학의 그 비코와 같은 이름이라 왠만하면 집사의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러시아에 오면서 그도 러시아식 이름을 짓게 되었고 그 이름은 세르게이. 종복이라는 뜻이다. 본인이 마음에 든다며 고른 이름이지만 러시아이름을 불러야 하는 상황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그리샤나 비코나 서로의 이름은 원래대로 부른다. 그러나 손님이 왔을 때는 세르게이, 미체르니 바실리예비치 라고 부른다.
◈이름의 정확한 뜻을 설명한다면 메테르니히 그레트헨 폰 바이뢰머는 '바이뢰머 영지 출신의 메테르니히'라는 의미가 되겠으나, 메테르니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영지 관리를 도맡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바이뢰머라는 영지를 가진'이라는 의미도 통용되었다.
◈메테르니히는 홍차도 좋아하지만 더 자주 마셨던 커피를 그리워할 때가 많다. 커피를 자주 마시는 것은 부와 신분을 상징했다.
◈메테르니히가 와인에 넣어 마시는 감미료는 중금속이 많이 포함이 되어있다. 18세기 사람들의 특징은 와인에 감미료를 많이 첨가해서 마셨다는 것인데, 그들의 사후 사망 원인으로 밝혀진 것에는 하나같이 중금속 중독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메테르니히는 합스부르크를 떠나온 후부터 러시아에선 와인을 마시지 않는다. 이유는 유통도 어려울 뿐더러 질이나 맛이 떨어지기 때문.
◈메테르니히가 사는 시대는 아직 18세기 초반이기 때문에 후세에 등장한 괴테, 칸트,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유명인들은 모른다.
◈메테르니히가 생전 그들과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그림에는 재능이 없다. 1도 없다. 무언가를 그리면 기묘한 형상의 무언가가 되는 어메이징 시츄에이션.
◈메테르니히는 그림은 형편없지만 노래는 수준급이다. 그래서 어릴 때 어머니가 우스갯소리로 "내 아들은 나중에 크면 아버지 일은 뒷전이고 음유시인이 되려나보다!"라고 카더라.
◈메테르니히는 군복무를 시작한 이후로 집에 붙어있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집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러닝 중 책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건 어디 한 번 근신하면서 집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함 보라지 라는 오너의 모옷된 심ㅁ보였다.
◈18세기의 결혼 적령기는 14세~18세였다. 고로 메테르니히의 '손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메테르니히의 '이만하면 어르신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은 과한 생각이다. 그 시대에 실질적인 나이로 어르신이라 할 정도면 40세 후반부터 해당사항이었다. 그러니 사회적인 취급은 어르신 정도여도, 실제로 사회적인 위치가 어르신이려면 그는 조금 더 나이가 들어야 할 것이다.
◈메테르니히가 편지에서 밝혔던 B는 부친의 이름, G는 본인의 미들네임이었다. B=Benedict, G=Gretchen.
◈메테르니히가 입고 있는 군복은 프로이센 군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군사제도, 행정 등은 프로이센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
◈메테르니히는 귀족 중에서는 드물게 군에서도 고위장교가 아니면서 이례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축에 속한다.
◈그 자체의 권력은 지대하지 않은데 발언의 공신력이 지대했다. 안나 이바노브나 시대에는 대놓고 특례를 줬으니까 더더욱 그러했다.
◈메테르니히에게 영지는 없다. 고로 이름뿐이지만 발언에 공신력이 이상할 정도로 있는 귀족이라 할 수 있다.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에선 그리체노프 백작이지만, 합스부르크에선 귀족 자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언제나 합스부르크의 나날을 그리워한다.
◈메테르니히는 장미정원이 나타난 순간 처음으로 신을 원망했다.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도착한 초대장을 삶에 있어 마지막 동앗줄처럼 소중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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